이 도안은 시쇄품이 제작돼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서명을 받아 발행공고까지 마쳤습니다. 발행공고를 마쳤다는 것은 정식 은행권으로서 유통채비가 모두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시쇄품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서명이 선명하다. 출처는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홈페이지 바로가기>
그러나 발행공고가 나가자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거세게 반발했다고 합니다. 특정종교를 두둔하는 것으로 비쳐져 여론도 부정적이었고요. 이는 아마도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불교도였다는 점 때문에 더욱 일이 커진듯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석굴암이 그려진 1만원권은 물건너 가버렸고, 한국은행은 이듬해 지금의 세종대왕이 도안된 새 1만원권을 발행합니다.
<아싸! 내가 주인공이다 ㅋㅋㅋ 석굴암이 1만원권에 들어갔으면 이런 장난은 못했겠네요.>
얼마전 퇴임한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은행에서만 무려 42년을 근무했다고 하는데요. 가장 잊지 못하는 사건으로 '석굴암 만원권 사건'을 꼽았다고 하네요. 아마 그때 고생을 많이 하셨나봐요. ^^;;
석굴암이 그려진 만원권은 시쇄품으로 나왔던 것 딱 두 장 밖에 없다고 하네요. 하나는 서울 한국은행 본관에 있는 화폐박물관에, 또 하나는 대구 화폐박물관에 각각 영구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으~ 화폐 수집가 여러분들은 굉장히 아쉬우시겠어요. ^^;;
불교의 나라에서 온 선물
부탄... 갑가지 왜 부탄 얘기냐고요? ㅋㅋㅋ
부탄은 현재 입헌군주국이지만, 전통과 종교에 있어서는 불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주제가 성립된 1907년 전까지는 푸나카 사원의 대승정 다르마 라자의 지배를 받았고, 행정 실무는 데프 라자(副王)가 행하는 승속(僧俗)의 이중 통치 형태를 갖고 있던 불교 국가입니다. 지금도 대승불교를 국교로 지정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고요.
이 부탄에서 세계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를 기념하기 위해 8차에 걸쳐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주인공으로 우리의 석굴암이 선정되었습니다. 앞면은 석굴암 본존불이며 뒷면에는 불교의 8가지 길상 중의 하나인 소라고둥(dungkar) 문양을 새겼습니다.
최초의 한국은행권은 요청에서 제조, 운반되기까지 10여일밖에 소요되지 않은, 세계화폐제조 역사상 최단시간이라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폐제조기술이 뛰어나서였을까요? 5만원권 지폐를 만들 때를 생각해보시면 지폐의 도안 가지고도 네티즌들이 토론에 나설 정도였는데, 그럴리가요. ^^;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고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 창립되었습니다. 하지만 13일 만인 6월 25일, 6.25 사변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행은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본점을 대전으로 옮겼습니다. 당시에는 일제시대에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고요. 전쟁이 나자 전쟁을 치를 자금이 부족해졌지요. 조선은행권으로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판단이 서자 한국은행은 첫 한국은행권을 발행하게 되었고 그것이 대한민국 제1호 지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은행이 발행한 <한국의 화폐> 41쪽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긴박하여 군당국의 차량지원을 얻어 대부분의 地金銀(純金 1,070kg, 銀 2,513kg)을 진해 해군통제부로 후송하였으나 소산하지 못한 일부 地金銀(純金 260kg, 銀 15,970kg)과 미발행 조선은행권 등은 6월 28일 북한군이 한국은행 본점 건물을 접수할 때 약탈되었다. 북한군은 이때 탈취한 미발행 은행권을 남한 경제를 교란시키는데 사용하였다. 한편, 본점을 대전으로 옮긴 한국은행의 미발행 화폐 보유액은 약 40억원에 불과하였으므로, 전시자금수요 증가에 따른 현금부족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은 급히 은행권을 새로이 발행하여 이미 발행된 조선은행권과 함께 통용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6월 29일 한국은행이 동경지점을 통해 요청하고 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도움으로 일본 대장성인쇄국에서 제조되어 그 해 7월 13일과 7월 14일에 100원권과 함께 총 154억 3천만원이 미 군용기편으로 김해공항에 운반되었습니다. 6.25 동란으로 모든 행정 절차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한국은행법 제26조의 긴급조치권에 의거하여, 한국은행 총재가 7월 20일 발행을 공고하고, 7월 22일에 최초 한국은행권이 대구에서 발행됩니다.
상황이 긴박하다 보니 디자인은 "최소한의 미술적 품위"를 유지한다는 개념으로 당시 주일대표부에 걸려 있던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를 천원권 디자인의 주 소재로 사용하게 되었고, 백원권 역시 주일대표부에 있던 책 가운데서 골라낸 광화문을 주 소재로 채택하여 평판으로 인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한국은행>을 풀어 쓴 은화가 삽입된 특수용지를 사용해 은행권의 품위와 위조방지에 대처하려고 했고, 조선은행권의 문자표기방식을 따르지 않으려고 <한국은행권>이란 문자를 표면 상단 중앙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표기해 독립국가의 자존을 드러냈습니다. 이때의 문자 표기 방식은 한국은행권의 기본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밤 미국 의회를 통과한 건강보험개혁법안을 두고 우리나라의 의회가 세종시와 4대강 사업을 처리하는 방식과 너무나 다르다는 이야기를 연일 접하고 있습니다. 1년 내내 토론하고, 다수결을 존중하며 반대파도 껴안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의회는 여당만의 '끝장 토론'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툭하면 회의장 점거, 장외투쟁을 일삼고 있는 걸 보면... 지금이 전시체제도 아닌데 왜 이래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50년 전 발행된 한국은행권의 뼈아픈 역사가 아직 우리나라의 토론 문화를 바꾸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봅니다.
마음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추위가 다시 찾아든 오늘, 운보 김기창 화백(1914~2001)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합니다. 만원권 지폐의 세종대왕을 한 번 더 보게 되네요. 아실 분은 다 아시겠지만 만원권의 세종대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렸습니다. 79년 6월 발행된 2차 만원권부터 김기창의 세종대왕 영정이 채택되어 도안으로 사용되어 왔고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만원권은 6차 만원권이지요.
도감번호 : 한국은행 나 만원권 (2차)
도감번호 : 한국은행 바 만원권 (6차) 크기 : 161*76㎜ 도안 : 세종대왕 초상, 일월오봉도/혼천의 발행개시 : 2007년 1월 22일 비고 : 홀로그램, 색변환잉크, 요판잠상, 숨은은선, 앞뒤판맞춤, 미세문자, 숨은그림, 돌출은화, 숨은막대, 볼록인쇄, 형광색사 등
몇 년전 운보 김기창의 친일논란으로 만원권에서 세종대왕 영정이 빠져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는데요, 이 영정은 1973년 10월 30일부터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번에 광화문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도 이 영정과 닮아있지요.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기준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친일 활동을 한 경력이 남아있는 화백이지만 그의 숨길 수 없는 뛰어난 재능 때문에 일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한 논란에선 비켜서서 글을 내리고 싶네요.. ;;;;
세종 영정 비단에 채색 153X211㎝ 1973년 작 영릉 세종전 봉안
‘장애를 딛고 선 천재화가’라는 책도 있는데, 그는 일곱 살 때 장티푸스를 앓는 바람에 귀머거리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일제 시절 중학을 나와 교사를 할 정도로 식견이 높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그림 그리는 재능을 일찍 알아채고 당시 어진화가였던 이당 김은호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여보내게 되지요. 김은호 화백은 운보의 첫 인상을 “상서로운 길조인 봉황새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는 듯 하였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1937년 <고담>이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특선을 받고, 1940년에는 선전 추천 작가가 됩니다. 이때는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두 동생과 할머니를 부양하는 가장이었습니다. 선전에서 특선으로 당선 되었을 때 신문에서는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24세 소년 가장이 가난과 신체적 장애를 이기고 얻어낸 의지와 예술 투혼의 승리”라며 격찬했지요.
이곳에 운보 김기창의 수상기록을 적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림 몇 점 올릴게요.
강호한일(江湖閑日) 비단에 수묵채색 120X64㎝ 1985년 작 조희명 소장
태양을 먹은 새 두방에 채색 39X32㎝ 1968년 작 운향미술관 소장
정청[精聽] 비단에 채색 130X193㎝ 1934년 제13회 선전 입선작 개인소장(일본)
개인적으로 김기창의 정청 그림을 보다보면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곤 합니다. 김기창이 21살 되던 해인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인데요, 이 그림의 모델은 운보의 막내동생으로 현재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기옥과 운보의 첫사랑 여인인 이소제입니다. ^^ 이소제는 운보의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조모와 함께 살 때 말이 통하지 않는 운보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기생이었다고 하죠. 이 작품 외에 여러 작품의 모델이 되어 주었는데 스무살이 채 못되어 폐결핵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ㅠ 이소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 선전에 입상을 해서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세상에 남게 될 줄 몰랐겠죠..
“..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침묵의 세계 속에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렇게 그림에 몰두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의 예술에 남다른 점이 느껴지는 것도 나의 오랜 침묵 때문에 생겨난 것일 겁니다. 나는 내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고 해서 우울해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지금 저녁 하늘에 파란 색 노을색 섞여 있습니다. 맑은 하늘 해질무렵의 오묘한 하늘색깔은 언제봐도 예뻐요. 추워도 좌절하지 말고, 기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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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가지고 장난치면 통화법에 걸리지 않나요.. 훼손할때만 그렇죠..
2010/05/27 13:10앗! 너무 재밌어서 그만...;; ^^
2010/05/28 13:48만원짜리 보고 빵~!터졌어요 ㅋㅋ
2010/05/27 14:34그나저나 처음 1만원권의 주인공이 본래부터 세종대왕이 아니었다니~!
칼리오페님 덕분에 지식이 늘어나네요ㅋ
앗 감사합니다 ㅋㅋㅋ
2010/05/28 13:49치즈루님 블로그에서도 좋은 지식을 많이 얻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