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아름답던, 그리고 참으로 순수했던, '마릴린 먼로'를 추억하며 [마릴린 먼로, 마릴린먼로, 마릴린 먼로 남편, 조 디마지오, 아서 밀러, 마릴린 먼로 죽음, 마릴린 먼로 자살, 예술메달, 화폐수집, 화동양행]

화폐 국내여행/별전 메달 기타 2010/08/05 09:12 Posted by 칼리오페


마릴린 먼로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매력적인 여배우? 백치미? 혹은 저급한? 마릴린 먼로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지요. 도대체 마릴린 먼로의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럴까요? 한번 살펴보지요.ㅋㅋㅋ 그런데 왜 갑자기 마릴린 먼로 이야기냐고요? ^^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말씀드리지요. ^^ (그치만 마릴린 먼로의 팬들은 아실 수도 있겠군요~)  



어린시절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모턴슨 Norma Jeane Mortenson 이라고 합니다. 알려진대로 그녀의 어린시절은 불행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지요. 결국 양부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지만,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이후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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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마릴린 먼로,
밝은 모습에 비해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죠.



1942년, 노마 진은 16세의 나이로 또 다른 양부모의 주선에 의해 짐 도허티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바로 해병대에 입대했고, 혼자 남은 노마 진은 군수공장에서 낙하산에 분무기로 위장도색 페인트칠을 하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버를 만나 모델과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섭니다. 아내가 하는 일을 못마땅히 여겼던 도허티는 노마 진과 이혼하죠. 첫번째 결혼생활에 실패한 것입니다. 노마 진은 헐리우드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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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첫번째 남편인 짐 도허티




연예생활과 결혼생활의 명암 

1946년 8월 26일, 노마 진은 이름을 마릴린 먼로로 바꾸고, 20세기폭스사와 첫 계약을 맺었다. 주로 모델로 활동했지만, 그것은 여배우로 성장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1947년 마릴린 먼로는 첫 번째 영화 <스쿠다 후! 스쿠다 헤이!>(1947), <위험한 세월 Dangerous Years>(1947), <코러스의 숙녀들 Ladies of the Chorus>(1949), <러브 해피 Love Happy>,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1950),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How to Marry a Millionaire>(1953) 등에 출연합니다. 특히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를 통해 마릴린 먼로가 ‘섹스 심벌’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게 됩니다.


1954년 마릴린 먼로는 유명한 야구선수였던 조 디마지오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대 최고의 배우와 스포츠 스타의 만남은 큰 화제를 낳았죠. 그러나 9개월만에 파경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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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두번째 남편이었던 조 디마지오



그러나 순탄치 않았던 이 기간, 마릴린 먼로는 세계인에게 익숙한, 자신의 이미지를 남기게 됩니다. 바로 <7년 만의 외출 The Seven Year Itch>(1955)에서, 지하철 환풍구 바람에 드레스가 들리는 관능적이면서도 코믹한 장면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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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하면 떠오르는 명장면이지요



매력적인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도 인정받고 싶어했던 먼로는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래스버그로부터 연기수업을 받습니다. 탁월한 연기력까지 갖춘 그녀는 할리우드로 돌아와 <버스 정류장 Bus Stop>(1956), 로렌스 올리비에와 공연한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1957),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 <부적합자 The Misfits>(1961)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1956년 유명 극작가인 아서 밀러와 세번째 결혼을 하지만, 1961년에 이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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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세번째 남편이었던 아서 밀러



이후 마릴린 먼로는 유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 가수 프랭크 시네트라와 이브 몽탕, 그리고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형제와 스캔들을 뿌립니다. 또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멕시코 여행 당시의 행동들이 FBI 국장에게 보고될 만큼 정치적으로 자유롭지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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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남자들(?)


 

죽음

1962년 8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침대에서 알몸인 체로 누워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향년 37세. 비록 한 차례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던 조 디마지오와의 재결합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죠. 사인은 수면제 과다로 발표되었지만, 그녀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혹자들은 마릴린 먼로가 늘 애정결핍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사랑했던 사람과 재혼을 앞둔 시점에 굳기 자살을 선택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아직도 사람들에 의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은 존.F. 케네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입니다. 그는 마릴린 먼로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불안해졌고, 결국 자신과 연계되어 있던 마피아에게 살해를 청부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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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6주 전,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사진




여전히 그녀를 추억하는 사람들

영화와 같았던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녀를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사후에 그녀의 묏자리(유골함)의 윗자리가 70대 여성에 의해 경매 매물로 놓였는데 약 450만 달러(한화 약 56억 2000만원)로 내놓아졌다고 합니다. 마릴린 먼로의 육체미가 돋보인 X-ray 사진 역시 1200달러(약 133만원) 내외로 거래되었죠. 약간 이상하기도 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마릴린 먼로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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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갑자기 마릴린 먼로 이야기나고요? ^^ 오늘이 마릴린 먼로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던 이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프랑스에서 나온 마릴린 먼로의 예술메달도 다양한 추억으로 그녀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겠네요. ^^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그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것이죠.
그들은 나를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결백한 척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하지 않죠.
그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나는 그들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듯 하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것이라곤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요.
그리고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마릴린 먼로(1926.6.1~196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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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ish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 디마지오가 정말 불쌍하죠.....먼로와 헤어지고 독신으로 살았다는....ㅠㅠ

    2010/08/05 09:19
    • 칼리 오페  수정/삭제

      매주 마릴린 먼로의 무덤에 꽃을 갖다 놓았다죠?

      숨을 거두면서도 "이제 마릴린 먼로를 만나겠군"이라고

      말했던 멋진 사람이었죠 ^^

      2010/08/05 17:22
  2. 세미예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릴린 먼로를 추억해 봅니다.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2010/08/05 09:42
    • 칼리 오페  수정/삭제

      네, 고맙습니다. ^^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0/08/05 17:23
  3. 핑구야 날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한 여자인것 같아요,.. 끝임없이 그를 흠모하고 기리는 분들이 많으니..

    2010/08/05 12:21
    • 칼리 오페  수정/삭제

      그러게 말이예요.
      참 아름답고, 참 순수했던 사람 같아요 ^^

      2010/08/0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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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소꿉친구 남동순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향년 107세) 한국조폐공사 유관순 기념메달 (화동양행)

화폐 국내여행/별전 메달 기타 2010/04/07 13:51 Posted by 칼리오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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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에서 유관순 열사의 친구인 남동순씨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젊은(?) 저는 유관순의 친구가 아직도 살아있었다고? 의문이 들었습니다. 향년 107세로 지난 3일 자택에서 별세한 남동순 할머니가 뉴스로 나온다는 것은 분명 그 분의 삶이 녹록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고요.

유관순 열사는 충남 천안 출신입니다. 3.1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장본인인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천안으로 내려가 3.1 운동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남동순 할머니는 1903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는데요, 6살 때부터 유관순 열사의 소꿉친구였습니다. 함께 자라나 이화학당에도 같이 진학했고,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도 갇혔고요, 3.1운동 직후 신익희 선생이 결성한 독립운동 잔체 '7인의 결사대'의 홍일점으로 중국, 연해주 몽골을 누볐던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광복 뒤에는 여러 사회활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평생 홀로 사셨습니다.

“고향이 둘 다 천안이잖어. 여섯 살 적부터 소꿉친구지. 관순이는 나보다 민첩하면서도 새암이 많았어 풀각시를 알어? 풀 뜯어 풀각시 만들 때 내가 먼저 만들면 관순이가 싫어해. 그래 비위 맞춘다고 내가 천천히 만들었지. 관순이는 또 심령이 좋고 사상이 좋았어. 은연중 일본말이 튀어나오면 ‘일본말을 잘하니 너는 친일파다’ 하면서 혼을 내. 그럼 내가 ‘동무끼린데 좀 봐주라’ 하며 호호거렸지."

선친 남승윤은 당시 4개 국어를 하는 외교관이셨습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남동순 할머니을 학교에 보내 가르침을 받게 했던 그는 독립운동에도 가담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지원으로 학교를 다녔던 남 할머니는 대신 할아버지에게 여자가 조신하지 않다고 많이 혼났다고 합니다.


아래는 조선일보 2005년 8월 13일자 기사에서 퍼온 인터뷰 부분입니다.

―3·1운동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듣고 싶어요. 누구 제안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셨어요?

“일제를 향한 분노에 누가 먼저랄 게 어디 있어. 들불처럼 번져나가니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고 학생들은 거리로 몰려간 거지. 나는 관순이하고 남산으로 올라갔다가 장충단을 거쳐 종로로 갔어. 그런데 어떤 남자가 그래. 둘이 붙어다니지 말고 하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를 부르라고.”


―그럼 유 열사 혼자서만 천안으로 내려가신 거네요.

“천안뿐인가.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았지.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어. 그러니 약이 오른 일본 헌병들이 관순이는 공주 감옥으로 처넣고 병천 관순이 집은 불 질러 태워버렸어. 관순이가 처음부터 열사로 대접받았던 건 아냐. 한동안 병천에서 는 유가(柳家) 놈들 때문에 우리가 못 산다고 동네 사람들 원망이 심했어. 일본놈들이 다 똑같은 종자 라며 못살게 구니까. 지금은 세계의 유관순이 되었으니 원이 없지.”


―7인 결사대엔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어요?

“3·1운동 이후에 신익희 선생이 ‘7인 결사대’란 걸 조직했는데 여성 대원이 필요하다는 거야. 우리나라 다 빼앗고 죽이는 일본 놈들에게 항거하는 사업이라고 해서 두말없이 따라갔지. 가보니 다 남자들이야. 상관 안 했어. 나라 구하는 데 남녀가 따로 있나. 그 길로 연해주, 몽골, 중국을 안방처럼 누비기 시작했지. 자금 전달부터 독립군들 옷 꿰매는 일, 무장투쟁까지 안해본 일 없어.”


―안 무서우셨어요? 총은 쏘셨고요?

“무서운 게 어디 있어. 총이 없어 칼을 썼지. 일본놈들 주재소, 경찰서 습격해 그냥 때려부수고. 배고픈 건 말도 못해. 가랑잎은 사발이고 싸릿가지는 젓가락인데, 먹을 게 있어야지. 운 좋으면 배추를 뜯어 소금에 고춧가루 넣어 죽을 끓여. 모자라면 대장이랑 나는 굶었어. 대신 솔 이파리를 씹어먹거나 불린 날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지.”


―죽을 고비도 많으셨겠어요.

“내가 보기보다 영리해. 한번은 독립자금을 전달하려고 나 혼자 압록강을 건너야 했지. 신발 바닥을 뜯어 거기에 미농지로 싼 돈을 넣어 가는 거야. 나루터에 일본놈들이 지키고 있다가 어딜 가냐고 물어. ‘강 너머 시집간 울 언니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몇 번 농을 걸다가 보내줘. 건너자마자 돈을 건네주고 바로 강을 건너왔더니 그놈들 눈초리가 이상해. 그래서 ‘가보니 만주로 이사 가고 없더라’며 얼른 내뺐지.”


―광복 후에는 박순천, 임영신 등 이끌던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셨지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여운형 선생은 좌익의 총수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왜 우익을 택하셨어요?

“계열로 보면 나도 사회주의 될 사람이지. 그런데 광복 직후 내게 은혜를 입은 한 형사가 날더러 평양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는거야. 그래야 여사님이 살 수 있다면서. 그땐 좌우 나뉘는 게 그렇게 허무했어. 목숨 걸고 되찾은 조국이 둘로 다시 쪼개졌으니 그게 평생 한이 돼.”


―그래서 전쟁고아들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셨군요.

“서울역, 남대문 시장에 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버글버글했어. 못 먹고 못 입어 그렇지 눈이며 코가 똑똑하게 잘생겼는데, 내가 얘들을 초등학교라도 보내서 제대로 살게 해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낙원동에 ‘한미고아원’을 만들었지. 한번은 미군들이 전쟁통에 총 맞은 아이들을 헬리콥터로 실어다가 남산에 수북이 데려다놓았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질 않아. 그래 화가 나서 ‘한국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는 팻말을 써붙여 놓았지. 난 지금도 자기 자식만 애지중지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 가.”


―그렇게 할머니 손을 거쳐간 자식들이 1000여명에 이른다면서요.

“대학은 4명밖에 못 갔지만, 대령도 나오고 선생도 나왔지. 딸들 시집 갈 때는 내가 친어머니인 줄 알고 사돈들이 ‘이리 이쁘게 잘 길러줘 고맙다’ 했어. 남편 없고 자식 없다고 사람들은 날 불쌍하게 볼는지 모르지만 난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해.”


―1975년엔 여자 예비군을 창설하셨지요? 남녀평등시대에 남자들에게만 국방을 맡길 수 없다면서…

“임진왜란 때 여자들도 행주 치마에 돌을 주워 날랐잖아. 권율 장군의 행주치마 부대 말이야. 젊은 여성 150명을 모아 자비로 예비군복을 만들어 입혔지. 벽제 군부대에 가서 남자 군인들이랑 똑같이 총 쏘는 연습을 하고 탱크도 타고. 평상시에는 봉사활동을 나갔어. 몇 년 못 갔지만 정말 멋지게 했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에도 아주 열심이셨지요?

“술 따르고 장구 두드리는 일만 빼놓고 내가 안해본 일이 있나.(웃음) 새마을운동을 두고 요즘 사람들 말이 많지만 난 신경쓰지 않아. 내 평생신조인 ‘근검절약’이라는 구호를 진심으로 외쳤지. 사치는 죄악이야.”


―결혼은 왜 안 하셨어요?

“양반집 과년한 처녀가 집 뛰쳐나가서 남자들과 어울려 독립운동 하는데 혼사가 들어올 리 없지. 독립운동하면서도 고향에서 흉볼까 싶어 남상절이니, 남미령이니 하는 가명을 썼어. 손목 한번 잡아 보려는 남자들이 왜 없었겠어? 그때마다 ‘이 돼지눈깔 같은 놈아, 냉수 먹고 속차리라’고 호통을 쳤지. 오직 조국 광복이 내 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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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서울 정동 유관순 기념관 뜰에서 모교 후배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한 남동순 할머니 (2005년)
 뒤편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유관순 열사의 조각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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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2월부터 한국조폐공사에서는 한국의 위대한 인물 100명을 선정하여 매월 2명의 인물을 발행하고 있는데요, 그 첫번째 달 주인공이 유관순 열사와 광개토 대왕이었습니다. 전면은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252 에 있는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된 표준 영정(한국화가 석천 윤여환 화백 /2007년 작)을 기초로 제작하였으며, 뒷면은 3.1 정신을 강하게 부각시킨 독립기념관 전시 조각상 3.1 정신상(조각가 박충흠/ 1986년 작) 가운데 메달 제조 특성상 이미지가 부각될 수 있는 부분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표준 영정은 친구인 남동순 여사의 증언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살아남은 건 관순이가 못다한 일을 하라는 천명이라고 생각하셨던 남동순 할머니는 이제 그 천명을 내려놓고 가실 때가 되신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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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구야 날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관순 열사의 친구분이 설아 계셨군요..

    2010/04/07 17:45
    • 칼리오페  수정/삭제

      너무 빨리 가버린 친구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사셨을까요. ^^ 친구분이 그동안 살아계셨다는 얘기를 듣고 유관순 열사나 3.1운동이 저와 그리 먼 얘기가 아닌 느낌이 들었습니다.

      2010/04/0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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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기념 메달]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그를 추모하며 (화동양행)

화폐 국내여행/별전 메달 기타 2010/03/29 18:39 Posted by 칼리오페


지난 금요일 안중근 의사의 100주년 추모식이 전국 곳곳에서, 중국 하얼빈과 뤼순에서, 미국 뉴욕 등지에서 열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추앙받기란 힘든 것이 보통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운명일텐데, 안중근 의사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인가 봅니다. 그만큼 많은 이에게 귀감인 것이지요. 군인에게는 국가에 대한 헌신을, 천주교 신자에게는 신앙인으로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효자인 아들이자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부성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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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 위해 몸 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


군인 친구들의 미니홈피에 등등에서 볼 수 있는 이 말은  순국 직전에 썼던 유훈이었습니다. 뤼순에서 감옥 근무를 했던 지바는 이 유필을 가보로 간직해 집안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안중근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그가 1944년에 죽은 뒤 그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아침저녁으로 추모하다가 후사가 없자 조카 미우라를 양녀로 삼아 그 대를 잇게 했고, 미우라는 이후 유필을 안중근 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사형 집행 전 간수가 마지막 말을 하라고 하자
"우리 대한국이 독립해야 동양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고 말하며 단순히 식민국가의 독립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사유를 보여준 동양 평화론을 주창했던 그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밧줄이 드리워져 순국하게 됩니다.



사형수 시신은 당시 법으로 3년 후 소각한다


사형날 안중근 의사는 두 아우인 정근, 공근을 면회하며 마지막 유언을 남김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 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릅니다. 안 의사의 유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로 부각될까 두려워했던 일본은 안 의사의 두 아우의 인도 요구를 묵살하고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습니다. 사형수인 경우엔 유족에게 그 유해를 돌려주는 최소한의 인도주의를 무시한 것입니다. 게다가 감옥 공동묘지에 묻힐 경우 당시 법으로 3년 후에 소각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를 모셔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고국으로 반장되지 못한 것은 일본 측의 옹졸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치적인 사유도 있다고 합니다. 광복 된 이후 김구 선생이 평양에서 남북정치지도자 회의를 할 때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안중근 유해 반장 문제를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김주석은 뤼순이 소련점령지라는 이유를 들어 무산시켰습니다.

그동안 각계에서 여러 차례 안 의사의 유해를 모셔오기 위해 유해발굴단을 현지에 보냈으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최근에는 2008년 우리 정부의 주선으로 박선주 충북대 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단'을 편성하여 두 차례에 걸쳐 현지 발굴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100주년을 맞아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계 인물들이 안 의사 유해를 찾아내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언제쯤 안 의사의 마지막 부탁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한국조폐공사에서는 2008년 2월부터 한국의 위대한 인물 100인 시리즈 기념메달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기념메달은 42번째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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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유묵을 200여점 남겼다고 합니다. 그 중 50여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진은 Ihoon333님의 푸딩 (http://pudding.paran.com/lhoon333 )에서 퍼왔습니다.




 백범이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어 놓은 사연이 담긴 지식채널e도 함께 올려둡니다.


지식채널e "네번째 묘"


내가 이토를 죽인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죄요

한국황제를 폐위시킨죄요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죄요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죄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죄요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군대를 해산시킨죄요

교육을 방해한죄요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요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트린 죄요

현재한국과 일본사이에 경쟁이 쉬지않고

살육이 끊이지않는데 태평무사한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죄요

동양평화를 깨뜨린죄요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죄





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서 적을 무찌르려 의지를 쌓았더니

이제야 뜻한 대로 좋은 때를 만났구나. 때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때를 만나는가? 북쪽바람 차기도 하나 내 피는 뜨겁구나.

쌓였던 원한을 한번 털어놓으면 어김없이 꼭 도적을 잡으리라.

우리 동포 형제자매들아, 이 공업(功業)을 잊지 말라.

만세,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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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구야 날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열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잘 읽고 갑니다.

    2010/03/29 21:37
    • 칼리오페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핑구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0/03/30 10:21
  2. 초얼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 안중근 의사께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지만 그를 통해 세세토록 영원히 살게 되셨지요...
    저한테는 목표가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이 죽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어쩌면 평생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가 이 땅에 깊은 뜻을 남기고 죽어서 영원히 살 수만 그리 하고 싶습니다.

    2010/03/29 23:30
    • 칼리오페  수정/삭제

      초얼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랄게요. ^^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0/03/30 10:22
  3. 온리청춘불패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진짜 일본놈 짜증나네여 첨엔 숙제 땜에 봤는데 안중근 의사 빨리 시신 찾아야 할텐데...

    2010/06/3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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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선물로 탁상에 두면 좋을 달력 메달 어떠세요? : 한국조폐공사 호랑이 해 캘린더 메달 2010

화폐 국내여행/별전 메달 기타 2010/02/01 07:28 Posted by 칼리오페
기억에 남는 새해 선물이 있으신가요?

칼리오페가 어릴 적 세뱃돈을 받으면 서울 올라가는 길에 아버지께로 돌아갔던 추억(ㅡㅜ)이 있답니다.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짭짤한 수입을 항상 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아버지가 큰아버지셔서 명절 때마다 고향의 집안 어르신들 용돈과 사촌동생들 세뱃돈을 위해 꽤 많은 돈을 준비해가셨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갈 땐 텅 빈 지갑을 보여주시면서 무언의 명령(?) (처음에는 돈이 없다고 달라고 하셨던 것도 같습니다만.. ^^;) 을 하셨었지요. 니네들 세뱃돈이 다 아버지가 그만큼 썼기 때문에 받은 것라던가요... ㅎㅎ

그래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설엔 세뱃돈을 아버지께 드리지 않고 제가 유난히 좋아했던 과학잡지를 1년 정기구독했었습니다. 지금도 보물처럼 책장 맨 아래 시렁에 1년치 잡지가 모아져 있지요. 이젠 더 들추어보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뿌듯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이번 설이 이제 딱 2주 남았습니다. 다다음주 일요일이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ㅎㄷㄷ 설 연휴가 너무 짧아요. ㅠㅠ by 시로유키님


고향에 내려가실 분들 표는 예매하셨는지요..(칼리오페는 기차표를 예매해놨답니다. ^_^) 올 설 휴가기간이 너무 짧아서 구정이라고 해도 귀경인파가 예년보다 줄어들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새해 선물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예년처럼 돈을 드리는 것보다 한 해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캘린더 메달이 어떨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호랑이의 기운이 느껴지는 데다 희소성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가치있는 보물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1년간 정기구독했던 잡지처럼요. 매번 돈봉투나 상품권, 혹은 과일세트나 먹을 거리를 가져다 드리는 것보다 경인년에 맞춰 수호신처럼 복을 가져다주고 불운에서 지켜주는 백호랑이를 선물해드리는 거.. 센스 백배 아닐까요? ^^& 호랑이 보면 힘이 나잖아요!! 2월의 첫 날,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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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바리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향이 어디신죠..
    저는 제주도에요.
    그치만 설에 가지를 못합니다.
    근무해야 해용..

    메달..캘린더..
    아이디어 좋은데요?ㅋㅋㅋ

    2010/02/03 22:08
    • 칼리오페  수정/삭제

      부모님 고향은 담양이에요.. ^^ 저도 나이 먹고서부터는 잘 가지 않는데요.. 어르신 분들께 좋을 것 같아요. ㅎ

      2010/02/04 15:00
  2. 핑구야 날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달력 화폐가 있네요,, 신기해라

    2010/02/22 19:15
  3. 프리피아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뭐라 멍칭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화동에서는 마이너분야인 버스토큰, 챌린지코인, 파킹토큰, 세차토큰, 푸드토큰, 트레이드토큰 같은 분야를 왜 취급하지 않는건지 궁금합니다.

    돈이 안돼서? ^^

    2010/02/28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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